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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무엇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가? 이것은 인류가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들 중 가장 많이 나오고, 또 가장 유명한 화두이다. 오죽하면 톨스토이 작품의 제목으로까지 나오게 되었을까? 사람이 살아가는 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노라면, 나는 사람은 자신만의 가치관을 두고, 그 목표의 만족과 달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답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다 정확하게 단정하여 표현해서 사람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간다. 그 만족이란 것은 그것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던, 좋은 근육을 갖는 것이던, 자신이 원하는 바, 목표를 성취하고, 달성하고, 이룩하여 자신만의 금자탑을 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에 있는 70억 인구의 자아가 모두 제각각이듯, 각자의 가치관도 제각각이며, 만족과 목표의 기준도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 어떤 이에겐 예술의 극한을 추구하는 것이 만족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종교적인 깨달음과 해탈이 만족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조국의 자주독립,광복이 일생의 목표일 수 있다. 모든 이들은 서로 다른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일반적이고 통념적인 행복의 기준을 적어보자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어서 사회적인 명예많은 부를 얻고 아름다운 배우자똑똑하고 말 잘듣는 자식들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오래오래 화목하게사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아 저것은 행복한 삶이다.‘라고 말하며, 행복이자 일생의 만족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정신병에 시달리고 스스로 귀를 절단한 고흐는? 청각을 잃은 작곡가 베토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처럼 바친 민족 운동가들은? 구한말 독립 운동가들은? 전쟁으로 인해 자식을 잃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은 채, 최후에는 총탄에 사망한 성웅 이순신 장군은? 그들은 불행했는가? 그들의 일생은 만족이 없는 비참하고 불행한 삶이였는가? 그들은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는가? 그들은 전부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충실한, 목표를 위한 삶을 살았다. 누군가는 예술의 완성을 위해 살았고, 누군가는 개인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살았고, 누군가는 조국과 신민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시하며 살았다. 그들이 택한 삶의 가치관은 단지 이러한 목표들을 개인적인 삶의 행복보다 높은 순위에 두었을 뿐이다. 그들의 삶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이 보다 높은 가치를 두었던 목표를 위해 움직였으며, 스스로 그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일반적이고 통념적인 삶의 가치관과 다른 삶을 살았다고 그들은 불행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단지 그들은 그들의 기준으로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부와 명예‘,’사회적인 관점에서의 성공보다 예술의 완성‘, ’광복‘, ’조국의 수호가 보다 중요하고 행복했으며 가치 있었을 뿐이다.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 속에서 우리는 개인의 가치관으로 보다 소중한 것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이것은 일종의 중력이다.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기듯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좀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목표로 삼아, 그것을 위해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일생의 목표이며, 그것을 이끄는 것은 개인의 만족이다. 사람은 만족을 위해 살며, 만족은 사람을 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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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인격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누구는 긍정적으로 해석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듯 인격이란 개인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하나의 거름망이다. 불교에서 말하길 똑같은 물을 마시더라도 뱀은 독을 만들고, 소는 우유를 만든다 하지 않던가. 인격은 자체적은 개인만의 철학과 가치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문화는 그런 인격들을 만드는 하나의 거대한 틀이다. 이렇게 거대한 하나의 틀 아래에서 찍혀서 만들어진 문화에 속한 인격들의 가치관 내에선 필연적으로 서로 겹치는 공통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이슬람 권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한국에선 장유유서 문화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문화권마다, 서로 다른 수많은 가치관이 있으며, 그 가치관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문화권마다 기본적인 가치관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며 그래서 서로 다른 문화권의 가치관과 인격의 차이는 결국 문화권 간에 충돌을 낳게 된다. 문화권 간의 가치관 차이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고대 그리스에선 소년과의 동성애가 단순 성욕에 휘둘리지 않는 정신적인 고귀한 사랑, 플라토닉 러브로 여겨져, 한층 높은 사랑으로 적극 장려 되어 대 유행을 했지만, 반대로 이슬람권에서 동성애는 끔찍한 죄악으로 여겨져서,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동성애자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낙사 시키거나, 또는 강제로 성전환 수술을 집행하여 남자를 여자로 바꿔버리기도 한다. 또 문화권 간의 차이로 인한 구체적인 충돌의 예를 들어보자면 대표적으로 세포이 항쟁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럽 문화권 내부에선 ‘,’돼지를 단순히 가축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이나 금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이슬람이나, 힌두교를 믿는 세포이들의 경우에는 는 신성한 동물이였으며,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영국은 화약의 탄포를 소 돼지 기름으로 코팅하였다. 힌두교와 이슬람권 내에서 이 문제는 민감한 것이였으며, 특히 힌두교의 경우에 기름과 직접 접촉시 해당 카스트를 잃게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지 못한 영국은 해당 문제를 항의한 세포이들을 명령 불복종으로 교수형에 처했고, 이는 결국 세포이들의 반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문화권마다 집단 구성원들 내에서 공통의 가치관을 공유하며, 해당 문화권에 속하는 개인은 문화권 안의 공통의 가치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해당 집단 내부에서 공유하는 가치관의 시작은 그 나름의 합리성과 정당성에서 기인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고착화되어 ?’라는 이유와 그 본질의 의미를 상실하고, 관습화와, 금기시 되기 때문이다. 이슬람권 내에서 돼지고기의 취식을 금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그 당시 중동에선 돼지를 기르기 힘들었으며, 위생적으로도 해로웠기에 그것을 금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돼지를 기르기 편해진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슬람 권 내부에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렇듯 문화는 개인의 인격의 고착화를 낳는다. 그리고 고착된 인격의 기반은 문화권의 갈등을 야기한다. 당장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이슬람권의 사람이 한국에 와서 여러명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말을 한다면 단순 호색가를 넘어서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권 내부에서는 정상적인 행동의 범주안에 들어간다. 인격이란, 개인만의 철학, 가치관을 포함한 하나의 자아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이 나고 자란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문화권에서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숭상하고, 문화권에서 천시여기며 기피하는 가치를 무시할 수 밖에 없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보다 많은 가치관과 견문이 들어왔지만, 자국의 영토 아래에 발을 딛고 똑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집단 아래에서 생활하는 한, 공통의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화는 문화권에 속한 인격들의 공통적 가치관을 찍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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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일상세계

 

보통, 살아가면서 스스로 삶에 철학을 대입한다고 자각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철학이란 어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교수와 학자들이 머리 싸매고 연구하는, 일상과 동 떨어진 모종의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과는 다르게 철학이란 일상 속에 존재하며, 적용되는 삶의 방식이자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개인의 행동 강령이며, 삶을 해석하는 하나의 가치관이자 창, 거름망이다. 자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경우도 많지만, 모든 사람은 대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철학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다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다. 통념과는 다르게 철학은 삶의 전체에서 함께하는, 일생의 동반적 존재이며, 과장을 좀 보태서 표현하자면 누가 빵집에 가서 빵을 하나 고른다고 해도 거기에는 본인만의 모종의 철학이 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이란 개인의 가치관, 인생관, 세상과 자신에 대한 본인만의 가치평가이자 판단 기준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 알려진 대표적이고 유명한 철학들 예컨대 니체의 초인론불교의 윤회 사상등은 단순히 다른 가치관들보다 높은 설득력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명시된 평가 기준, 꾸준한 해석과 연구로 인해 유명해진 브랜드 철학들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자신만의 가치평가의 기준이 다른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이면서도 당연한 일이다. 70명이 있으면 70명의 자아와 인격이 모두 다르듯, 개개인의 철학들은 비슷하고 겹치는 부분도 분명 존재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똑같은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유한 개인 자신만의 철학에는 잘못되고 왜곡된 비뚤어진 부분이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사회를 통하여, 사회와 더불어 서로의 철학을 교류함을 통해, 의견 교환을 통해 이러한 자신의 철학의 오류를 바로잡고, 수정함을 통해 보다 나은 인간으로 발돋움 할 수 있다. 철학은 우리의 가치관일 뿐만 아니라, 교류와 학습,수정을 통하여 보다 발전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자 발돋움 수단이다. 앞서말했듯 철학이란 가치관이다. 가치관은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섰을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일상의 깊은 부분에서부터 영향을 미치며, 삶의 종반까지 꾸준히 적용된다. 일상 안에 철학은 늘 공존하며, 사람은 그것을 인식하던 인식하지 않던 철학적으로 살게 된다. 이는 마치 노자와 장자가 세상 만물 모든 것에 도가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한, 거기에는 모두 철학이 존재한다.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내쉬는 한 호흡, 내딛는 한 걸음마다 우리 자신만의 철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은 개인의 삶 모든 구석구석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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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일상세계

 

자유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누군가가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행동을 하는데 제약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행 하여 책임 질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일반적이고 건전한 현대 민주사회의 안이라면, 자유는 늘상 개인이 살아가는 일상 안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숨을 쉴 세 없이 쉬지만 살아가는 동안 정작 그 소중함을 잘 깨닫지 못하듯이, 사람은 평소에는 일상적으로 영위하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자유는 상실을 통해서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일평생을 노예로 묶여있다가 그 사슬이 끊겨 해방 되는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인식하고 있지만, 자유란 굳이 그런 사례만이 아닌, 한 없이 일상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마치 식사시간마다 좋아하는 음식을 고를 수 있는 것도, 날씨가 좋으니 동네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것도, 원하는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전부 자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일상적이고, 이전까지 인식되지 않았던 자유가 박탈 당했을 때, 사람은 큰 상실감을 받고, 비로소 자유의 가치를 뼈져리게 인식하게 된다. 자유가 상실 된 일상 속에서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자유의 탈환으로 여기게 된다. 이전까지는 인식하지 않았던 일상 속의 자유를, 상실 이후에 더없는 축복이자, 인생의 목표까지 격상시키는 것이다. 자유의 상실 안에서 사람은 끝없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느끼며, 일시적이거나, 포상적,우연적 자유에 목을 매달며, 소소한 자유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곤 한다. 마치 묶여사는 흑인 노예가 몸값을 모아, 자유를 얻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하듯, 군인이 전역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듯, 자유가 박탈된 인간은, 자유의 가치를 너무나 뼈져리게 깨닫고 만다. 소중한 것은 내려놓음으로서 비로서 그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또한 일상 안에서 자유의 진정한 가치는, 깨닫지 못한 단순한 일상적 행복감만이 아니다. 일상 안에서 자유는 개인의 성장 원동력이다. 자유는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게 만드는 자립 능력을 성장시킨다. 하지만 이런 스스로 생각하여 행동할 자유가 배제 되버린 일상은, 자립적이지않고, 오직 타의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기계적이고 불행한 일상이다. 그런 일상은 스스로 생각할 원동력마저 거세되어, 타인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더 이상 어떠한 발전의 여지가 박탈당해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정체되버리고, 죽어버린 삶이다. 훌륭하고 살아있는 이란, 생동하고 변화하는 삶이란, ’사회, 일상의 안에 필연적으로 자유가 포함 되어있는 주체적인 삶이여만한다. 건전한 일상이란 반드시 자유를 내포하고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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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 도덕을 지켜야 할까?

 

예술은 필연적으로 평가를 원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술이 아닌 것들 즉 단순한 사물, 혹은 행위도 평가를 받고, 인정 받아 의미를 부여받는다면 그것은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의 이라는 시처럼, 관객은 단순한 부수적인 것이 아닌 사물과 행위에 예술로 만들어주는 존재이다. 지난 날, 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하여 평가를 받고 예술품으로 만든 시도나, 광고판을 예술이라 칭했던 전례들을 생각해보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공감해준 사람들이 있다면 평범한 사물, 사건일지라도 예술로서 성립할 수 있단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세상에는 엄연히 행위예술이라는 사례도 존재한다. 일견 기괴해보일 수도 있는, 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도 있는 행위에도 우리는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덧붙일 수 있다. 그렇게 예술은 필연적으로 예술에 공감해줄 사람이 제작자 외에 단 한 명이라도 필요로 하다. 그렇기에 예술은 사람과, 관객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다.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거듭한 끝에 그것이 우리 사회의 도덕 규범을 어겨서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몹시 곤란한 일이다. 도덕이란 사회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우리 인간들 사이의 하나의 묵시적, 혹은 명시적 규칙에 해당한다. 우리 사회 안에서 누군가 이러한 일을 하면 서로 곤란할테니 그러지 말자, 혹은 이렇게 하자 하고 정해놓은 것이다. 그러한 규범을 예술적 시도의 일환으로 어기게 된다면 그 강도에 따라 작게는 혹평과 비난을 받고, 크게는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인간 사회에서 살면서, 인간 사회 안에서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것은 다소 양심이 없는 일이다. 마치 물속에서 헤엄을 치면서 물에 젖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함께하기 살기 위해 만들어놓은 최소한의 도덕규범, 혹은 규칙조차 어기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스스로 사회에서 공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도덕 규범을 어기고 산다해도, 관객이 필요없는 혼자만의 예술을 추구하고자, 어디 동굴같은 곳에서 스스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간다면 별 탈이 없겠으나,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도덕규범을 어기는 예술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술을 마시면서 안전운전을 추구하는 것 만큼이나 모순적인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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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예술 중 무엇이 더 아름다운가?

 

자연과 예술의 미적 우위는 서로 가늠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판단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꼽아보자면 나는 예술의 미에 우위를 두고 싶다. 이유를 말하노라면 자연은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고, 그것을 가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타고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하고 있다. 인간이 노력으로 만들어낸 황금비가 혹한의 침엽림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나, 벌집에서 황금장방형의 형태를 발견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우연적인 듯 필연적인, 무수한 자연의 심미적 가치들의 사례 앞에서 우리 인간들은 먼 옛날에 신적 존재를 자연에게 투영하곤 했다. 왜냐하면 자연미는 인간이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밀하며, 또 웅대하기 때문이다.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관점 모두를 통틀어 자연은 아름답다. 우연의 산물인지, 혹은 자연 스스로의 필연성인지는 모르나, 인간은 그것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 그것을 찬미한다.

 

하지만 그와 정 반대로 예술은 오롯이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필연적 역사의 집합체이다. 인간이 만들어온 예술은 먼 옛날 석기시대의 동굴벽화와 진흙으로 빚어낸 풍만한 비너스처럼 다소 조악하면서 서툰 형상에서 시작되어,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의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거쳐 작금의 평범함에 의미를 부여해 예술로 만드는 것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그간 수많은 심미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황금비의 형태를 발견했으며 이를 토대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내었고, 또 사실을 정확히 묘사하였으며, 빛을 예술의 일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일상의 기성품에 예술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리는 등, 초현실주의까지 접어들었다. 우리 인간의 예술은 점진적이자, 발전해 나아가왔다.

 

자연의 미, 그것은 틀림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이는 완전하기에 더 발전할 수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완결된 작품이자. 더 이상의 수정을 가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예술은 자연미를 단순 묘사하고 따라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다 높은 단계의 미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골계미, 퇴폐미.. 등등.. 인간의 미는 솟아오르는 불길과도 같다. 끝없이 연마하고 발전하며 새로운 미를 찾아서 나가는 탐험가와도 같다.

 

무엇이 더 위대한가? 태어났을 때부터 위대한 자연과, 끝없는 노력으로 아름다움에 도달하고 발전한 예술 중 무엇이 더 위대한가? 나는 예술의 미가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다. 그렇기에 나는 자연보다 예술이 더 아름답다고 감히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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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아름다움과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심미적인 아름다움과 추상적인(또는 개념적인) 아름다움은 세상에 형용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보이는 아름다움은 소위 말하는 완벽함이라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 우리는 어떤 사물을 바라 봤을 때 본능적으로 그것이 완벽함에 가까운 것인지 그렇지 아닌지, 즉 아름다운지 추한지를 알아본다. 그 말인 즉슨 우리는 이미 보이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답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과학적으로 설명된 심미적 아름다움의 공식이 소위 말하는 황금비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물이 황금비율에 가까울수록 그것을 아름답다.’라고 여긴다. 또한 우리는 비율이 황금비에서 떨어져 제멋대로 난잡하게 흐트러진 것들을 추하다고 여기며 일정한 형태에 딱 들어맞는 맞춤 고리가 있는 것, 일련하게 정렬되어 있는 것들을 아름답다 여긴다. 실험에 의한 사례를 따져보면 인간은 좌우대칭인 것을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더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 두 사례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이다. 우리가 심미적, 보이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례의 공통점은 규칙성이다. 우리는 규칙적이고 일정한 비율을 반복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보다 완벽하다고 느낀다.

 

반대로 추상적인,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우리는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형용이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아름답다 여기며, 또 누구는 신을 위해 성지를 수복하고, 이교도들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여긴다. 추상적 아름다움은 사람마다 서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다르다. 즉 추상적 아름다움은 이는 개인적 가치에 기인하여 판별되는데, 개인적 가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가치관은 문화권, 국가, 지역, 종교, 시대 등의 집단적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기에 추상적 아름다움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되 서로 공유되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집단적 가치의 영향을 받기 쉽다는 점에서 추상적 아름다움은 왜곡되기 쉽다. 예컨데 집단이 추악한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떠받는다면, 개인은 그것을 진정 아름다운 가치로 생각하여 세뇌될 수도 있다.

 

근대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표방하며 국가를 위해 장렬히 희생할 것을 종용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자살특공, 카미카제며, 반자이 돌격이다. 또 중세 유럽은 예루살렘을 기독교의 성지이며, 그것을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 수복하는 것을 아름다운 가치라 여겨 너도나도 십자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증오심을 품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면 가족은 명예를 위해 여성을 죽인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 여겨진다. 그들은 진정 그것을 아름다움’, ‘옳음이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점으로 봤을 때 세 가지 사례 모두 추악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이라 느껴진다. 집단 간의 가치가 서로 부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 충돌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듯 심미적 아름다움은 황금률, 좌우 대칭 같이 그것을 규명하는 명확한 논리가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추상적 아름다움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며, 문화권, 시대 등 집단의 가치에 따라 변화 되어진다. 간혹 심미적 아름다움과 추상적 아름다움이 결합하여 집단이 받아들여지는 가치에 심미적 가치를 더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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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사회통념 적으로 보았을 때, 속물로 보일까 아무도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름답고 삶이란 성공한 삶이다. 그리고 성공한 삶이란 수십억 원대 연봉을 받고 슈퍼카를 끌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회적 위치에 있고, 아름다운 배우자와 사랑하는 가족을 꾸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한국 사회 통념상 아름답고 성공한 삶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지극히 속물적이고 세속적인 아름다운 이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은요? 슈퍼카를 끌지 않고 부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는데 그녀는 아름답지 못한 삶을 산 것인가요?’ 하고 물어본다면, 아마 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 그런 아름다운 삶도 존재하지.’라고 말할 것이다. 이 세상 음식의 범주 안에 피자와 취두부가 있지만, 그 둘엔 꽤나 큰 차이가 존재하듯이, 아름다움 또한 서로간의 차이가 큰 수많은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점 가운데서, 이 세상 속에 우리가 아름다운 삶이라 칭하는 것들에겐 똑같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자신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믿었던 가치들을 실현하는데 성공한 삶이였다는 점이다. 그렇다.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느끼던, 혹은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봉사, 노동, 종교적 삶 등)에 가치를 느끼던 삶 속에서 자신이 믿은 그것을 실현 하는데 성공한 삶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같지 않듯, 개인이 원하는 가치는 전부 다 다르다. 누군가는 많은 돈을 버는 것에서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고, 또 누구는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것에서, 또 누구는 조국의 독립, 또 다른 누구는 아름다운 몸과 얼굴에서도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삶은 우리의 자아 실현, 가치의 실현을 위한 거대한 캔버스라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이룩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삶이란 그 거대한 장 속에서 우리 자신이 가장 원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믿는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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